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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메이드 퀸 

적적히 붉은 조명과 방 안 가득 사람이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로 휑하게 느껴지는 음침한 분위기는 상기할 때마다 피부가 아려왔다. 조금만 더 잘 꾸며놓았더라면 이곳은 어딘가의 장례식장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라고 그녀는 하릴없이 그런 생각을 품는 것이었다. 머리에서 흐르는 피를 바닥에 늘어놓은 채 바짝 제압당한 남자를 눈앞에 두고 하는 것치곤 지나치게 평화로운 생각이었다. 그녀는 제 생각에 대고 그렇게 평가하며 좀 더 연민을 가지려고 노력해본다. 흩뿌려진 검붉은색이 전혀 붉게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이곳이 붉은 조명이 지배하는 공간이었음에도.

"…연… 이내…."

"…아직도 말할 기력이 있나?"

남자의 갈라진 목소리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그를 무릎 꿇려 붙들고 있는 남자에게 눈짓했다. 그녀의 눈짓을 받은 남자는 그의 머리를 잡고 바닥으로 처박았다. 옅은 연둣빛을 띠는 그의 밝은 머리가 공중을 그리는가 싶더니 둔탁한, 그리고 제법 큰 소리가 났다. 그녀는 눈가를 움찔했다. 그가 걱정돼서 나온 행동은 전혀 아니었다. 그녀는 그 와중에도 그렇게 변명했다.

"…너, 왜…."

지극히도 가련한 목소리였다. 그녀는 좀 전에 놀라서 눈가를 깜짝한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이 냉담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보면 좀 전의 불편함이 꼭 그 소리가 단순히 그녀의 취향이 아니었기에 일어난 불쾌감이라 추측하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그녀는 딱히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그것은 정정할 여지도 없이 사실이었다. 물론 놀란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녀는 지극히 단조롭고 일견 무거워 보이기까지 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너라니, 호칭은 제대로 해야지. …이그나지오."

방안을 메우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순 그녀를 향했다 떨어졌다. 그들은 처음 듣는 것이었을 터였다. 셰이드. 그 이름이 입가를 맴돌았던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녀는 그 이름보단 이 이름을 부르는 것이 더 효과적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면서 또 자신에게 눈치를 주는 것이었다. 너도 참 징그러운 사람이라고.

"―이… 내…."

"―보스."

"…."

"그게 마땅하다고, 너도 그리 생각하지? ―안 그런가?"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조곤조곤했고 내용의 여하를 떠나 누구든 숨죽이게 만드는 힘이 서려 있었다. 그녀 스스로 끔찍히 싫어하는, 바로 그 목소리였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소리를 지르는데 뛰어나지도 않고 분위기를 띄우는데에도 훌륭하지 못한, 쓸데없이 진지한 목소리였지만 지금과 같은 긴장 속에서야말로 그 목소리는 제 역할을 충실히 발하고 있었다. 거의 목소리가 긴장한 것이 아닌 목소리에 긴장이 조성된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만을 뚫어져라 내려다보고 있었던 그녀조차도 제가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침묵이었다. 별다른 반항을 준비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녀의 앞에 얌전히 엎드려져 축 늘어져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문득 바닥을 수놓은 피가 붉지 않았던 것이 피보다 밝은 다홍색의 카펫 때문임을 깨달았다. 붉은 조명과 붉은 카펫. 검고 붉은 것 사이에서 유난히 푸르른 그는 그녀 눈의 유일한 위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보스."

그녀의 바로 옆에서 움직이지 않던 검은 양복의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오며 이름 불렀다. 그녀의 고개가 돌아갔다. 남자의 시선은 바닥에 박혀있어서 키가 작은 그녀였음에도 눈을 마주치기 쉽지 않았다. 그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의도된 것이었으리라.

"―그분이."

"…금방 끝내지. ―일어서라."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었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짧은 의사표현이었으나 그녀의 대답은 망설임의 여지없이 떨어졌다. 단답이라도 돌아오는 말소리는 그 어디에도 없었지만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의 몸이 일으켜졌다. 그는 척 보기에도 왜소한 체격은 아니었으나 한참 건장한 사람 둘 사이에 힘없이 붙들려있으니 매달린 것 같기도 한 모양새였다.

"돌아올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마라."

"…."

"―돌아와 봤자 아무것도 없을 거다."

그녀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의 시선은 이 방의 다른 이들이 그렇듯이 땅바닥을 맴돌고 있었기에 그녀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감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은 눈 감기로 한 사실이었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있는 손을 풀고 제가 기댄 책상을 끝을 매만졌다. 제 아버지가 썼고 오늘부터 제 것인 책상이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착각하진 마."

"내가?"

반문하는 그녀의 목소리엔 명백히 비소가 섞여 있었다.

"―이겼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여전히 그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제 양옆으로 책상을 지탱하고 있던 팔 하나를 들어 다른 팔의 팔꿈치 안쪽 부분을 만졌다. 팔짱을 낀 것이 거부의 무의식적인 표현이라 한다면 이 행동은 그것의 범주 어디 구석에 속해있는 행동일지도 몰랐다.

"―내가?"

그녀의 표정과 목소리엔 이렇다 할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으나 그것은 두말할 여지 없는 비웃음이었다. 지나치게 평화로운 어조는 그 속에 담겨있는 비웃음을 오히려 더 반짝이게 하고 있었다. 까마귀를 닮은 그의 녹빛 눈은 설령 그것이 제 머리 위에서 반짝인다 하더라도 놓칠 리가 없었다.

"나가 봐. …너희들도."

대답 대신 분주한 발소리만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를 붙든 남자가 저가 인사하고 이어서 그를 그녀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게 만들었을 터였으나 그녀는 일부러 눈 감아 덮기로 했다. 보고 싶은 장면은 아니었다. 더욱이 인상적일 장면도 아니었다. 그녀는 현실에서 멀어지려는 듯 붉은 조명 아래 서서 칠흑이 아닌 붉은 암흑을 보려고 애쓰는 것이었다.

어울리지 않았다. 일견 좁아 보였으나 그녀 혼자 쓰기엔 충분할 정도로 커다란 방과 숨이라도 조일 듯이 몸을 압박해오는 검은 정장까지, 그녀를 둘러싼 모든 것이. 그의 말이 맞았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승리한 적이 없었다. 애초에 도전이란 것을 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녀의 전리품은 당연하게도 온전히 그녀의 것이 아니었으며 그녀의 행보조차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은 '그 남자'의 것이었다.

이 조직의 선대 보스였던 아버지가 제 유일한 혈육이 딸이라는 이유로 모두의 기대를 물리치고 그, 이그나지오에게 제 자리를 물려주려 마음먹었던 것이 벌써 몇 년 전의 일이었다. 그녀는 그 결정을 제 귀로 들은 유일한 사람이었으며 그가 다음 대 보스의 자리를 이어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조직의 보스가 되고 싶다는 소원 따위 빈 적이 없었다. 너무나 당연했기에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이 일이 저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절실히 실감하고 있었다. 전혀 하지 못하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굳이 하고 싶지는 않았다. 고아였던 그와 그의 형제를 어여삐 여긴 제 아비 때문에 형제와 어린 시절부터 함께 보낸 그녀였기에 감히 탈출을 꿈꾸는 것이었다.

그는 천부적이었다.

그는 조직 내에서 셰이드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그나지오라는 이름은 기껏해야 전대 보스나 그의 형제, 그녀 정도가 기억하고 있는 이름이었다. 모두가 그를 셰이드라 불렀다. 쌍둥이인 제 형제 쉐도우와 서로 맞춘듯한 그 이름은 다소 웃음이 나오는 이야기일지 몰랐으나, 턱 끝까지 차오른 웃음을 깜짝 놀라 도로 삼킬 정도로 그는 그림자 같은 사람이었다. 그것은 재능이었다. 그녀가 마땅히 가졌어야 할지도 모르는.

"―내가 너를 차기 보스로 만들어주지."

목소리는 기억의 너머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 남자였다. 쉐도우, 그의 형제의 목소리였다. 탁하게 밝은 연두색의 머리와 선명한 녹빛의 눈을 한 그와는 달리 짙은 남색의 머리에 선홍빛의 붉은 눈이 인상적인 남자였다. 서로를 몰라 착각할 수가 없을 정도의 다름이었으나 그들은 그 와중에서도 소름 끼치게 닮아있었다. 기억 속에 남은 남자의 말은 분명 그녀를 향하고 있었으며 그의 선연한 두 눈 역시도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조직 내에서 쉐도우라 불렸으며 그녀를 차기 보스로 만들어주겠다 약조한 그 남자는 저가 성인이 되었을 무렵에 이미 조직을 빠져나간 지 오래였다. 그러나 유능한 차기 보스 후보 중 하나인 그의 형제라는 지위와, 신무영이라는 이름으로 저 혼자 일궈낸 재력은 조직 밖의 남자가 차기 보스를 거론할 정도로 막강했으며 실제로도 그 뜻을 이루는 데 훌륭히 활용된 것이었다.

"그놈은 너무 위험해."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변명인 것 같기도 했다. 셋은 함께 자랐지만 둘 다 과묵하기로 유명한 무영과 그녀는 서먹한 사이였고 이그나지오, 그에 비하면 이렇다 할 교류도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녀가 알기로 무영은 조직에 미련이 없었다. 전대 보스가 지명까지 한 그는 제 형제를 아끼는 사람이었고 굳이 적통을 따질 것도 없는 이곳에서 저보다야 그를 올리는 게 미련을 해소하는 데엔 더없이 적합할 터였다. 그녀는 제 입술을 짓씹었다. 이미 제 의심이 더 없이 파헤쳐진 와중에도 미련스레 그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었다. 위험하다. 그녀는 그것이 변명 같아서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가 감은 눈을 떴다. 시야가 약간 불긋한 것이 사방이 어지러운 것 같기도 하였으나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쩌니, 제가 선택한 일이었다. 무영, 그의 말에 설득당한 것은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차기 보스로 커왔으니 제 기분이 어떻든 일은 능숙하게 해낼 것이었다. 그녀는 저 스스로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이 길이 쉬워보여서 그래 선택한 것이었나? 뭔가 더 다른 것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똑똑. 생각지 않게 동그란 소리에 그녀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마침 그가 오기로 한 것을 그새 깜빡 잊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시계를 한 번 보고는 걸터앉은 거나 다름 없는 책상에서 내려와 바로 서며 말했다.

"들어 와요."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리고 그가 들어왔다. 서로 만난다는 점에서는 익숙했지만 그녀가 그를 맞이한다는 점에서 지나치게 어색한 대면이었다. 그녀는 걸어 들어오는 그를 바라보며 한 가지 큰 차이점 눈치챌 수 있었다. 항상 입에 물려있던 레몬맛 사탕이 오늘은 없었다. 무슨 바람이 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축하하지."

그녀의 얼굴을 보고 내뱉은 그의 첫마디였다. 그녀는 의문도, 반발심도, 더불어 형용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도 함께 들었지만 저가 할 수 있는 것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일이었다.

"…원하는 대로 되셔서 좋겠어요."

변명하건대 비꼴 의도는 전혀 아니었다. 그녀는 제 말이 마냥 좋게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설핏 후회했으나 그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까딱해 긍정을 표할 뿐이었다. 갑작스럽게 묘한 정적이 이어졌다. 그녀는 제가 먼저 나서서 무언가 입 밖으로 해야 한다는 강박과 싸우고는 제 말이 한가하게 들리지 않게 주의하며 조심스레 입을 여는 것이었다. 타협이 없었으니 그것은 패배였다.

"저를 도와주셨으니… 감사해야겠죠."

그녀의 말투만큼이나 떨떠름한 말이었다. 그가 그녀의 탈출을 알고도 그녀에게 그런 제안을 한 것인지 그녀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저를 보는 눈 때문에라도 밝힐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또 그 때문에 밝힐 마음도 없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그런 낌새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고 평가할만한 훌륭한 처세였으나, 그의 눈이 얼마나 맹수를 닮았는지는 그녀는 알지 못했고 알아낼 자신도 없어 다만 제게 넘겨준 말들로만 지레짐작하는 데에 열중할 뿐이었다. 따라서 그가 단순히 이그나지오가 위험하기에 저를 도와주겠다 한 말은 의심을 불러일으키기에도 눈 감고 믿어주기에도 적합해 그녀를 더 미궁으로 밀어 넣는 데에 충분했다.

대답을 기다리듯이 그녀는 말을 멈췄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사실은 그녀를 묘하게 초조하게 만드는 데에 일조해 그의 대답을 재촉할 셈으로 벌린 입으로 다른 내뱉게 하는 것이었다.

"앞으로 조직의 일은 당신의 걱정이 필요 없도록 조정하도록 하죠. 당신이 우려하는 가장 큰 문제인 셰이드… 아니, 이그나지오가 당신 손에 떨어졌으니 큰 문제도 없을 테지만."

멀다면 멀고, 길다면 긴 여정이었다. 그녀는 성취감은 없어도 명백한 승리자였고 제 기분이 어떻든 계획대로 일은 흘러가고 있었다. 제 아비가 아닌, 그의 계획대로. 그녀는 기뻐해야 하는 건지 제대로 알 수 없었다. 더 근본적으로, 제가 그의 말을 수락한 속셈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이제 더 그도, 이그나지오도 만날 일이 없음을 자꾸만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묻고 싶은 게 있었어요."

그것은 전적으로 이 한마디를 위해서였다.

"당신… 진심으로 그가 두렵나요?"

그의 도홍색 눈이 점멸했다. 그는 그녀의 눈에 똑바로 눈 맞춰 오듯이 그 시선을 따라 했다. 그녀는 잠시 후회했으나 뱉어진 말을 되돌릴 수단은 없었다.

"…두렵지."

그녀는 저가 섬칫 몸을 떨 정도로 당당한 와중에도 그가 도망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왜 나였나요?"

"왜냐고?"

그가 웃었다.

"당신이 뭘 말하고 싶은지는 알겠군. 네가 그 자리를 바라지 않는 거? 알고 있었어."

그가 발을 내디뎠다. 그녀에게 다가오는 방향이었다.

"그가 두렵냐고? 그럼, 두렵지. 더욱이 내가 당신에게 한 경고는 사실이었으니까."

"경고? 제게요?"

이제 그는 그녀와 숨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훨씬 체격이 좋은 그와 눈을 맞추기 위해서는 고개를 떨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개를 들어야 헀으나 그녀는 검은 옷자락밖에 보이지 않는 시야를 수정할 생각이 없는 듯 움직이지 않았다.

"생각해."

그의 큰 손이 그녀의 볼에 닿고 그녀의 눈을 그에게 끌어당겼다.

"그가 제게 가장 위험한 게 누구라고 생각하나?"

그녀의 금안이 찬란히 빛났다.

"그가 가장 갖고 싶은 게 뭐라고 생각하나?"

네가 갖고 싶어. 신무영이기도 이그나지오이기도 한 목소리로 울려 퍼지는 그 말을 그녀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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