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d evening, My love. 오늘도 총은 안 맞은 것 같으니 그나마 다행이네요."
잠겨있던 펍의 문을 몇 번 잡아 당기던 대릴은 좀도둑질을 하다가 들킨 틴에이저처럼 흠칫 어깨를 떨며 문에서 멀어졌다. 그의 어깨와 목덜미 사이에 머리 끝이 걸쳐지는 자그마한 체구의 윤은 그런 그를 비아냥과 순수한 웃음 사이에 걸린 미묘한 표정으로 지켜보더니, Would I? 하고 물으며 떨어지라는 손짓을 했다. 그는 주인의 명령에 충실하게 따르는 개 마냥 손짓 한 번에 얌전하게 두어 발자국 문에서 멀어졌다. 고개를 숙여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에서 네온 사인만큼 발갛게 달아오른 볼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덜걱, 덜걱, 문고리가 몇 번 움직이고 문이 열리자 계집애는 문 안 쪽으로 스며들듯 미끄러졌다. 몇 번을 봐도 따라 할 수 없을 만큼 우아하고 고요한 행동의 편린에서 그는 쓴 맛을 씹어 삼켰다. 그리고 꼭 계집애의 걸음걸이를 따라 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처럼, 추위에 뻣뻣하게 굳어 움직이지 않는 다리로 펍의 안 쪽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아직도 어둠이 쌓여있는 펍의 안 쪽에서는 텁텁한 먼지의 냄새와 함께 여주인의 살결 안 쪽에서 풍기는 기묘한 단 내가 어지럽게 섞여 있었다.
"가게는 늘 여덟 시 반에 열잖아요. 단골이면서 내가 언제 문을 여는지도 잊어버렸어요?"
"술 마시러 온 게 아니거든. 다른 걸 사러 왔지."
"다른 것도 마찬가지에요, 내 사랑. 여덟 시 반이 아니면 아무 것도 안 팔아요."
희미하게 전등이 켜졌다. 껌벅거리며 꺼질 것처럼 번쩍이는 전등을 보며 그는 가죽 점퍼의 앞 주머니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 들었다. 근교의 모든 정보를 손 안에 쥐고 주무른다는 높은 명성과는 달리 계집애는 제가 운영하는 펍에 대해서는 상당히 인색했다. 술이나 안주야 저도 먹으니 꼬박꼬박 들여놓는다 치더라도 펍의 인테리어는 나 몰라라 하며 던져 놓은 지가 오래였다. 카운터 안 쪽에서 머리를 묶던 계집애는 그가 성냥을 꺼내는 것을 물끄러미 보더니 아저씨, 하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담배 꽁지를 잇새 사이에 끼어놓은 채로 그는 익숙하게 담배를 한 대 더 꺼내 손가락에 걸쳐 유연하게 허리를 숙인 계집애의 입술 앞으로 가져다 대 주었다. 계집애는 길게 내려온 머리카락을 귓가에 걸며 담배의 끝 부분을 부드럽게 물었다. 손가락 위로 스친 체온이 애매하게 차가웠다. 그는 성냥을 그어 담뱃불을 붙이고 어느 샌가 계집애가 앞으로 밀어놓은 물수건 위에 성냥 끝을 문질렀다.
"정말이지, 늘 독한 것만 피운다니까... 그러다가 폐암 걸려서 훅 가버리는 거 한 순간이에요?"
"순한 걸로 하루에 스무 대 피우는 거랑, 독한 걸로 열 대 피우는 거, 둘 다 똑같지 않냐?"
설마. 계집애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그의 불 붙은 담배와 제 담배를 맞대어 불을 붙이고 마저 허리를 폈다. 코트를 벗은 계집애는 더없이 가벼운 셔츠와 검은 청바지 차림이었는데, 난로에 불씨 한 점 던져 넣지 않아놓고도 추위를 못 느끼는 사람인 양 느긋하게 카운터 안 쪽을 누볐다. 어둑한 주방 안 쪽에 아주 희미한 백열등을 하나 켜 놓고, 곧 있으면 몰려올 시끄럽고 더러운 사내 놈들을 위한 테이블 위와 연결된 전등의 전원을 켜고... 그는 계집애가 마른 몸뚱이를 춤추듯 움직이고 휘며 가게 안을 휩쓰는 것을 지켜보면서 마른 입술을 혀 끝으로 축였다. 지난번에-그러니까 최근 들어 마지막으로 밤을 보냈을 때의 잔상이 흩어지는 머리채 아래에 물방울처럼 고였다가 허리를 펴는 움직임에 떨어져갔다. 아저씨. 짤막한 부름이 허공과 계집애의 사이를 애매하게 훑던 눈동자를 잡아챘다. 한 순간의 발걸음으로 그의 무릎 앞에까지 도달한 계집애가 다시 부드럽게 허리를 숙여 그의 지저분한 갈색 머리카락을 손 빗으로 빗어 내리고 물러섰다. 다른 걸 사러 왔다면서요, 집중해야지. 그는 몸을 뒤로 물리며 코웃음을 쳤다.
"난 너랑 자면서 한 번도 돈을 준 적이 없는데."
"오... 왜 내가 아저씨랑만 잘 거라고 생각을 해요?"
"왜냐면, 네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유리잔이 부딪치며 짤랑짤랑 소리가 났다. 스테인리스로 만들어진 찬장에서 위스키 잔을 꺼내며 계집애는 목을 나직하게 울리며 웃었다. 그는 제 앞까지 훅 밀려오는 위스키 잔을 받아 쥐며 담배 끝을 짓뭉갠 잇새 사이로 길게 담배연기를 뿜어냈다. 옅은 주홍빛을 띈 백열등의 빛무리 사이로 희멀건 담배 연기가 뒤섞였다가 다시 물처럼 퍼져나갔다. 계집애는 긴 호흡으로 담배 연기를 들이마시더니 허공 위로 둥근 모양이 나도록 연기를 뱉었다. 정말이지. 짧은 탄식의 끝에서 기묘한 탄 내가 났다. 이러니 내가 안 예뻐할 수가 있나! 그렇게 말하는 손아귀 안에는 계집애가 장식장의 제법 안 쪽에 숨겨두고 애지중지하던 싱글 몰트 위스키가 들려 있었다. 그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저걸 드디어 꺼내는 걸 보면 내가 제법 예쁜 짓을 한 모양이구먼."
"아까 내가 말했잖아요? 이거 값은 안 받을게요. 예쁜 짓을 했으면 그만큼 예쁨 받아야 하는 법이니까."
"내가 사랑한다고 했나?"
"오늘은 처음이에요."
계집애는 물소리가 선연하게 들리도록 위스키 잔 안으로 술을 채워 넣었다. 얼음도 물도 없이 곧장 위장으로 내려갈 황금빛의 물줄기를 보며 그는 손가락으로 바 위를 엉터리 리듬에 맞추어 두드렸다. 계집애는 잔이 아슬아슬하게 차도록 채운 후 잿더미가 늘어난 담뱃대를 싱크대 위로 툭 털었다. 목덜미가 구부러지도록 고개를 쭉 젖혀 술을 삼킨 그는 곧장 열기가 치미는 귓등을 무시하며 잔을 바 위로 뒤집어 엎었다. 좋은 술은 좋은 술이었다. 왜 계집애가 장식장 안 쪽에 숨겨두고 그에게도 이제야 꺼내주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그 모습을 보던 계집애는 깔깔 웃으며 담배를 카운터 위에 눌러 끄고는 팔짱을 낀 팔 사이로 뺨을 파묻었다. 도저히 슬럼가에서 혼자 술집을 끌고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어리고 순한 얼굴이 댕글댕글 큰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 저 얼굴을 알지. 그는 담배를 한 번 길게 빨아올리며 그렇게 생각했다. 저 얼굴이 뭘 말하는 지 알아.
"자아, 그럼. 이제 뭘 사러 왔는지 말해봐요."
아저씨한테는 특별히 디스카운트 해 줄게요, 내 사랑. 한없이 순진한 귀한 집의 어린 영애처럼 속닥거리는 소리에 그는 콧등에 머무는 담배 연기를 숨으로 불어 흩어내며 재밌다는 듯 목을 울려 웃었다. 둥그렇게 아치형으로 휜 눈썹이며 눈매가 유독 순한 계집애가 사실은 이 근방의 정보를 모조리 손에 넣은 정보상에 크리스털(마약)부터 총기까지 팔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은 유명한 일이었으니까. 그는 마른 입술을 한 번 핥고, 엎어놓았던 잔을 들어 부드럽게 흔들었다.
“목이 좀 타는데.”
계집애가 한 쪽 눈썹을 찡긋 치켜올렸다. 그는 느긋하게 웃으며 다시 한 번, 목이 말라서 말이 안 나와, 하고 속삭였다. 가소롭고 재밌다는 듯 그 모양새를 보던 계집애는 술잔이 가득 차도록 술을 붓고 그대로 제 입에 털어넣은 다음, 그대로 입술을 맞붙여왔다. 벌어진 입 안으로 알코올 향이 독하게 풍기는 위스키가 혀 위를 적시고 목 안쪽으로 스며들었다. 황금빛 술방울이 턱 위를 흐르는 것을 느끼며 그가 바 위로 반 쯤 올라온 계집애의 뺨을 잡아당기고 허리를 끌어당겼다. 얇은 셔츠자락 아래에서 맥동하는 젊은 피부가 느껴졌다. 타액인지 술인지 모를 액체들이 한참동안 입술 안 쪽에서 뒤섞였다.
백열등이 깜박였다. 길게 입술을 붙이고 신음처럼 혀를 섞던 계집애는 은실처럼 늘어지는 타액을 남기고 그에게서 몸을 물렸다. 옅게 붉은색을 띄는 입술이 한가득 젖어있었다. 그는 잠깐동안 계집애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았다가 풀었다. 속 안에서 불이 확 당겨졌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으니까. 허리를 곧게 세우고 오연하게 그를 바라보는 계집애의 목덜미 쯤을 향해 그는 반나마 재로 뭉그러진 필터를 쭉 물어 빨아낸 연기를 훅 소리가 나도록 불었다.
“릭이 ‘구원자들’ 쪽과 접선할 모양이야.”
구정물이 넘쳐 흐르는 이 곳에서 유난스럽게도(물론, 안타깝게도, 그럼에도 갱단임에는 다를 바가 없지만) 깨끗한 손을 유지하려고 하는 갱단의 보스와 새로이 세력을 넓히며 미친개처럼 가리지 않고 물어대는 갱단의 이름을 동시에 들은 계집애가 와그작 소리가 들릴 정도로 미간을 구겼다. 희미한 불빛이 구겨진 미간 아래에 뭉그러져 가루로 부서졌다. 릭이 네간이랑 접촉하려고 한다구요? 그는 어린 혀 끝에 올라앉는 그 쉬운 이름 두 개가, 이미 몰락하고 부서져 경찰조차 어떻게 손을 대지 못하는 이 지역에서 미친 듯이 패권을 다투는 두 거대 갱단의 보스들의 이름이라고 자기도 모르게 이야기하지 않기 위해 혀 끝을 지근지근 물었다. 그리고 특히, 후자는 어지간한 놈들은 알지도 못하며 거대 갱단의 언더보스인 그도 며칠 전에야 겨우 알아낸 이름이라는 것 역시. 말을 꺼냈다간 라 돌체의 여주인이 모를 정보가 어디있느냐며 퉁박이나 맞을 것이 뻔했으니까. 바깥쪽으로 약간 밀어놓은 위스키 병이 약간 초조한 듯 바 안쪽에서 서성거리는 계집애의 발소리에 맞춰 쨍강거렸다.
“릭 요즘 약해요? 엑스터시 같은 종류?”
“애가 둘인데, 그걸 하겠냐? 그리고 미숀이 그걸 퍽이나 두고 보겠다.”
“그럼 약도 안 하는 인간이 네간하고 접선을 하겠다고 나서요? 이 근방에서 구원자들이랑 네간이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녔는지 모르는 인간이 있긴 해요?”
찡그려진 미간 위로 혐오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지역의 거리거리마다 피냄새를 물큰하게 풍기던 소문들을 떠올리며 없겠지, 하고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사람 모가지 따는 일에 거침 하나 없으면서 뻔뻔하게도 구원자들이라고 저희들을 칭하는데 모를 리가 없었다. 고작해야 몇 주 전 그는 릭과 함께 소동에 휩쓸렸던 회색 지대의 가게를 들렸던 적이 있었다. 머리마다 깔끔하게 구멍을 내 놓은 시체들을 보며 치밀어오르는 욕지기를 집어 삼켰지. 괜히 그 식은 몸뚱이며 핏물의 웅덩이가 가득 고인 술집의 모습이 떠올라 그는 바를 손가락 끝으로 도르륵 소리가 나게 두드렸다. 계집애는 잠깐동안 제 입술을 꼭 물었다가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아저씨도 같이 가요? 묻는 목소리 끝이 떨리는 것 같다고, 그는 문득 생각했다.
“말해봐요, 아저씨도 가요?”
“...명색이 언더보스니까.”
셰인이 죽고 난 뒤로는. 그는 텁텁하게 따라붙는 단어를 목 아래로 씹어삼켰다. 계집애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콧등을 찡그린 채 팔짱을 꼈다. 그가 갱의 말단이었을 때-그러니까, 릭의 눈에 오래도록 들어 언더보스로의 충격적일 정도의 신분상승을 하기 전부터 그와 말을, 숨을, 혀를, 그리고 몸을 섞어온 계집애의 눈길을 은근하게 비끼며 그는 잔 안으로 거의 다 타들어간 담배의 재를 털었다. 계집애는 가끔 릭과 그의 눈에 띄는 행보를 두고 자살희망자들이라며 비꼬기도 했다. 다른 갱의 보스며 언더보스들은 가짜며 무어며 늘어놓고 저들 몸 숨기기에 급급한데 그들은 유달리 앞으로 나선다는 것이었다. 그는 마른 입술을 혀로 훑으며 계집애의 이름을 속삭였다. 윤. 연기처럼 짧은 발음이 싱글 몰트 위스키의 맛이 낙인처럼 남은 혀를 맴돌았다. 꼬맹아.
계집애는 팔짱을 낀 상태로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곧 아무 말 없이 제 셔츠 앞주머니를 뒤지다가 손을 떨어뜨렸다. 순한 눈매 속 물결무늬가 새겨진 갈색 눈동자가 말끄러미 그의 손등부터 목덜미까지를 훑고 지나쳤다. 네간은 정보를 흔하게 흘리진 않아요. 짤막한 목소리가 바람처럼 속삭였다. 하지만, 요즘 들어 들은 가장 흥미로운 정보는.
“...이번에, 드와이트라는 남자가 새롭게 언더보스가 됐어요. 이례적인 일이죠.”
“내가 셰인이 죽은 이후에 언더보스가 된 것처럼?”
“적어도 아저씨는 릭이 개인적으로 신임하는 사람이었잖아요. 전부터 충성심도 확실했고. 드와이트는 충성심은 없었어요. 그는 두어번 정도 네간과 관련된 정보를 경찰에게 가져다 팔았는데... 마지막으로 정보를 흘렸을 때 네간이 그 사람을 증인보호프로그램이 발동하기 전에 낚아챈 다음, 지독하게 굴려댔죠.”
한쪽 얼굴을 완전히 지져버렸어요. 운이 나빴죠. 계집애는 한쪽 입꼬리를 일그러뜨리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목소리는 비웃는 것도 같았고, 또 동정하는 것도 같았다. 그는 검지 손가락으로 바를 툭툭 두드리며 머릿속으로 목소리와 정보를 분리해 한 켠으로 밀어두었다. 드와이트, 언더보스, 한쪽 얼굴 화상, 경찰에 정보를 가져다 팜... 계집애는 무심하게 그가 재떨이 대용으로 쓴 술잔을 집어들었다.
“그런데 대체 왜 그런 새끼를 언더보스로 삼은 거야? 매저키스트?”
“아-뇨. 드와이트가 아내를 팔았어요.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같이 살던 아내가 있었는데, 네간한테 그 아내를 줬다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과거의 드와이트 부인은 지금... 더 정확하게는 신고를 한 건 네간과의 결혼 뿐이니까...”
말 끝이 부드럽게 흐려졌다. 계집애는 눈동자를 굴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본심이 아니었다는 말이 많아요, 네간이 억지로 빼앗았다는 설도 유력하고. 그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의외의 이야기였다. 본의가 아니게 아내를 빼앗긴 남자, 그리고 얻은 언더보스의 자리. 파고들기엔 네간 본인 보다는 그 아래의 언더보스를 후벼파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자기혐오는 금방 틈을 만들어내므로. 말이야 접선이지 사실상 거리의 골목골목마다 시체를 널어두고 가는 그들에 대한 정보를 아는 것이 더 시급했기 때문에 파고들 수 있는 곳은 확실하게 파악하고 가는 것이 좋았다. 그는 머릿속으로 휠맨인 글렌이 시간이 날 때마다 주워온 정보들의 편린과 이번에 알게 된 덩어리를 접붙이며 바 위로 약간 구부렸던 허리를 우두둑 소리가 나도록 폈다. 잠깐 등을 돌려 검은 앞치마를 허리에 묶던 계집애가 여상하게 물었다.
“이만하면 됐어요? 다른 건 다 당신도 알만한 얘기라서, 딱히 더 해줄 건 없는 것 같은데.”
“지금 걸로도 충분해. 글렌이 일주일 돌아다녀서 모아온 것보다 술 두 잔 마시는 동안 네가 해준 얘기가 더 많으니까.”
마른 등 뒤에서 빈정거림에 가까운 웃음이 한 번 튀어나왔다. 그는 그 웃음 소리에서 그의 어린 계집애이자 라 돌체의 젊은 여주인이 제법 화가 나 있음을 알아차렸다. 계집애는 그가 위험에 처할 때마다, 혹은 그런 가능성이 있는 일을 맡을 때마다 질색을 했다. 몇 년 전 언더보스가 된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도시 안 쪽에서 가장 오래 도사렸던 거버너의 갱단과의 지리멸렬한 총격전 끝에 옆구리가 뚫린 그가 응급실로 실려갔을 때 지갑에 명함이 있었다는 이유로 팔자에도 없이 아내라는 거짓말을 해가며 수술 동의서에 서명을 했던 그 새벽의 이후는 더했다. 그는 윗입술을 지근지근 물었다. 차마 괜찮을거야, 라는 말은 할 수가 없는 탓이었다. 그가 눈썹 밑으로 눈동자를 굴리는 사이 바텐더들이 쓰는 앞치마를 허리에 묶은 계집애가 몸을 돌렸다. 날 선 웃음소리와는 다르게 얼굴은 덤덤했다. 그는 모르는 척 몸을 일으켰다.
“값은? 매번 하던 식으로 매기한테 맞기면 되나?”
“...아뇨, 이번엔 조금 색다르게 할까 하는데.”
나긋한 발걸음이 휘 돌아 그가 있는 곳까지 나섰다. 그는 저를 조용히 올려다보는 계집애의 눈동자를 깊숙하게 들여다보았다. 지금보다 더 앳되었을 때의 계집애가 떠올랐다. 복사꽃을 양 뺨에 물들이고도 침착하게 피스톨을 당기던 자그마한 소녀, 피투성이의 몸을 끌고 온 그에게 술 대신 따뜻하게 덥힌 우유를 내밀었던, 다정하고 상냥한 계집애. 가느다란 손가락이 눈가를 쓸고 목덜미로 미끄러졌다. 바짝 붙은 몸 사이에서 약간의 열기가 피었다 사그라들었다.
“아저씨가 직접 가져와줘요. 아니면 빚으로 달아놓을 거야.”
“내가?”
“Uh-huh. 네간과 접선하고, 무사하게 돌아오면... 그 때.”
그 때 나한테 가져와줘요. 당신이 직접. 흰 손끝이 쇄골쯤에 오래도록 머물다 떨어졌다. 나직한 목소리가 꺼진 담배 연기처럼 목울대를 스치고 백열등 불빛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는 잠깐 동안 마른 입술을 혀 끝으로 스쳤다. 무사하게 돌아오면, 이라는 문장이 서늘하고 무거웠다. 그는 미래를 약속하기에는 너무 끔찍한 곳에 있었다. 약속을 해도 믿을 수 없는 곳에 있었다. 윤도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그는 혀 끝을 물었다. 쉬이 내뱉을 수 없는 약속이 목에 걸린 알약 무더기처럼 목 안 쪽을 꽉 틀어막았다. 약속할 수 있을까? 약속을 할 수 있는 상황일까. 움푹 팬 볼에 손가락 끝을 가볍게 가져다 떼며 계집애가 속삭였다. 약속해줄래요? 라고.
고개를 깊게 숙이면 숨이 섞였다. 길게 내려온 속눈썹이 깜박였다 가볍게 내려앉았다. 아직도 술의 향이 남아있는 입술로 어린 입술을 가볍게 누르자 쌉쌀하게 섞인 담뱃진의 향기가 하나로 뭉그러들었다. 혀가 섞이지 않는 가볍고 다정한 입맞춤은 언제고 숨과 타액이 뒤섞이던 새벽의 깊은 키스보다 낯설었지만, 어쩐지 충분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뭇거리며 떨어지는 입술 위로 체온이 남아있었다. 그는 버석하게 잠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음이야. 금새라도 닿을 것 같은 입술 위로 숨이 쏟아졌다. 계집애가 잠깐 살그머니 입을 벌렸다가 속삭임처럼 웃었다. 백열등이 다시 한 번 깜박, 하고 흔들렸다.
“...돌아오면 제대로 이자까지 쳐줄테니까. 저 빌어먹을... 전구도 갈아주고.”
마지막으로 붙인 말에 계집애가 나직하게 푸하, 하고 웃음 섞인 숨을 뱉어냈다. 손가락 끝이 가만, 가만, 뺨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요, 하고. 작은 목소리가 속삭였다. 그래요, 그렇게 해요, 아저씨 마음대로, 그렇게 해요. 희미하게 가루가 되어 사라질 것 같은 빛무리 안 쪽으로 잠겨든 계집애가 웃었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