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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6시, 겨울에는 해가 조금 이르게 떨어진다. 도시 위로 드리워지는 그림자가 길어질수록 바빠지는 이들 중에는 몇 가지 부류가 있다. 술로 마음과 몸을 데우기 위해 발을 옮기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위한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종업원들. 번화가의 구석에 위치한 바에는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 특히나 많이 모인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소리지만. 해피 아워를 맞아 퇴근길의 직장인들이 쉽게 멈춰갈 수 있는 그런 바이다, 그가 일하는 곳은. 내부를 화려하게 꾸민 것도, 천장에 샹들리에나 화려한 라이트를 달아 둔 것도 아니다. 적당히 누구나 스쳐 지나가며 괜찮은 술집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 그런 가게. 낮에는 평범한 카페로 운영되나 옆의 공간을 길게 차지한 바가 이곳의 정체를 확실히 해준다.
토키야가 제 옷의 매무새가 제대로 되었는지 홀의 거울로 확인하고 바의 뒤로 걸어가자 지나가는 직원들이 그를 부르며 인사한다. 물론 그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돌려주었다.

“퇴근하시는 건가요? 수고하셨습니다.”
“어어, 토키야도 힘내라고! 그래도 오늘 저녁은 많이 안 올 것 같은데?”
“좀 더 시간이 지나야 아는 일이죠. 단체로 들이닥칠지도 모르잖습니까?”
“글쎄. 난 슬슬 돌아가야지.”

지쳤다는 의사를 표하듯 어깨를 으쓱한 바텐더는 기지개를 켰다. 이미 벗어서 걸어 둔 앞치마는 꽤 젖어 있었다. 아마 전 시간은 그가 가끔 하는 말처럼 전쟁 같았나 보다. 바텐더라고 카페 쪽이 바쁠 때 손 놓고 노는 것이 아니니. 오히려 고급인력에 속하는 축이라 더 많은 일을 떠맡았을 테지. 저번 주였나, 잠시 시프트를 바꿨던 날 웨이터 일까지 처리하려 달려 다녔던 기억이 나 이치노세 토키야는 비식, 마른 웃음을 지었다. 방금까지 설거지를 하고 있었는지, 작은 싱크대에 셰이커와 얇은 두께의 잔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그는 옆에 걸린 린넨 천을 집어 들어 와인 글라스를 조심스레 닦았다.

“학교에서 바로 오는 길이야?”

어느새 유니폼에서 사복으로 갈아입은 건지, 전 시간의 바텐더, 쇼가 고개를 불쑥 들이민다. 그는 어지간히도 어려 보이는 얼굴로 바텐더 일을 하고 있었는데, 실상 나이는 토키야 그보다도 6살이나 많았다. 물론 그들을 나란히 세워 두면 다들 쇼가 한두 살 어릴 거라 짚을 게 뻔하다. 심한 경우에는 술집에서 내쫓길 만한 얼굴이면서, 바텐더라니. 큰 원인은 그의 자그마한 체구 때문일 테다. 아무리 굽이 높은 신발과 멋진 페도라로 속여보아도 그의 키가 저보다 한참 어린 토키야보다 한참 작다는 건 감출 수 없었다. 토키야도 그의 나이를 착각해 초면에 실수를 범했으나, 쇼는 자주 있는 일이라며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고 말았었다.

“토키야? 너 왜 그래, 멍하니 있고. 답지 않게.”
“아뇨, 별생각 안 했습니다.”
“아니, 그거 별생각 했다는 소리잖아.”

토키야는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라며 능숙하게 그의 질문을 피해갔다. 쇼의 페도라 챙이 그의 심정을 대변하듯 파들파들 떨린다. 쉽게도 반응하는 타입의 사람이다. 그렇지만 너무 놀린다면 진심으로 싫어할 테니, 토키야는 대신 쇼의 질문에 적당히 대답하기로 했다.

“네, 강의가 끝나고 도서관에서 공부를 조금.”

흐응. 수긍하는 소리를 길게 내며 쇼는 고개를 끄덕였다. 장하다며 등을 팡팡 치지는 않는 게 차라리 다행이다. 쇼와 연배가 비슷한 선배들은 그가 학업을 겸하며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호탕하게 웃으며 어린 게 대단하네! 라던지, 목소리 크게 그를 칭찬하고는 했다. 토키야는 그 관심을 그다지 반기지는 않아 담백한 쇼의 반응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쇼의 관심은 토키야의 깔끔한 일 처리에 조금 더 쏠려 있었으니까.
아니나다를까, 그의 선배는 다시 고개를 돌려 토키야가 손에 들고 있는 컵을 건네 받아 조명에 비춰보며 확인한다. 잘 하는 게 맞는 건지 쇼는 만족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너 역시 잘 배우네. 자격증 딴 지도 얼마 안 됐지?”
“자격증을 딴 건 3개월 전이네요. 이곳에서 일을 배운 건 2달 전입니다만.”
“거봐. 역시 대단하잖아.”

길고 긴 한숨 끝에 쇼는 다시 한번 길게 기지개를 켰다. 며칠 전부터 낮에 오는 새 아르바이트생은 손이 느리다고 들었다. 거기에 이번 주에는 일에 나오지 못하는 휴우가 선배 대신에 신입의 교육은 온전히 쇼에게 떠맡겨졌다. 어제도 고생했다며 죽을상을 하더니, 오늘도 비슷했던 모양이었다. 토키야가 섬세한 손길로 유리잔을 랙에 올려두는 걸 보며 쇼는 계속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리고 있었다.

“그대로 오늘은 좀 흉흉한 손님은 안 와서 망정이지.”
“예의 그 마피아라도 기대하셨습니까?”

아, 거기. 쇼는 들고 있던 컵을 토키야에게 다시 건넸다. 이 도시의 괴담, 도시 전설 같은 조직. 그걸 사람들은 뭉뚱그려 마피아라고 칭했다. 물론 도시 전설이 다 그러하듯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이 바에서는 때때로 마피아에 대한 이야기가 돌고는 했다. 가장 질이 나쁜 소문으로는 잘못 찍히면 가족 3대를 전부 잡아가 장기 매매에 써버린다 던지, 아니면 바다에 가라앉힌다 던지. 토키야는 그 마피아, 혹은 도시 전설에 예의 바른 정도의 관심만 표했다. 바 안에서 들리는 과장 섞인 소문들은 출처도 알 수 없는 괴담일 때가 많았으나, 그중에서 진실은 어느 정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냥 마약을 거래하는 집단이 아닐까, 쇼는 자주 의구심을 표했지만.

“오늘도 아까 손님이 와서 얘기하고 가던데, 얼마 전에 부둣가에서 났던 총기 사고, 그 마피아 일이었다면서.”

그럴 리가. 그는 작게 코웃음을 쳤다. 쇼도 그렇지? 라는 눈빛을 던지고는 페도라를 벗어 손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뭐, 아주 거짓말은 아닐지도 모르지. 그래도 이 나라에서 총기를 소지하는 건 불법은 아니잖아? 내 친구만 해도 호신용으로 집에 뒀다던데.”
“당연한 선택이네요.”
“친구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녀석인데… 요즘은 대체 뭘 하고 지내는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뭐, 원래도 사격이 취미라고 말하긴 했어.”

마지막으로 한 번 페도라를 빙글 돌린 쇼가 그걸 다시 제 머리에 썼다. 토키야는 그 특이한 취향의 친구에게 약간의 흥미가 일었으나, 그보다는 제 손에 들린 위스키 잔에 손자국이 생겼을지의 여부가 더 급한 일이라 그것에서 시선을 떼지는 않았다.

“아무튼, 그 마피아 소속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나도 본 적 없지만, 수상해 보이는 사람이야 자주 봤지. 요즘 불시 검문이 늘고 있는 것도 그것 때문이라던데… 정말, 이상한 도시야.”
“빛이 있는 곳에는 그림자가 있다고들 하니까요. 그리 놀랍지는 않네요.”

글쎄, 그야 그렇지만….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는 쇼의 목소리 위로 문이 열리는 소리가 겹쳐진다. 어서 오세요, 입에 붙은 인사를 내뱉기도 전 구두 굽이 바닥에 닿는 소리에 모든 신경이 집중된다.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은 검은색 힐에서 나는 소리이다. 키가 늘씬한 여자에게 꼭 어울리는 하이힐.
또각또각, 마룻바닥과 힐의 끝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가까워졌고 쇼는 슬쩍 그녀를 쳐다보고는 토키야를 흘깃 보았다. 토키야는 또 다른 크리스털 잔을 들어 그걸 닦는 것에 집중한다. 아니, 시도한다.

“그러면 나는 슬슬 돌아가련다, 토키야. 힘내 보라고.”

허리를 몇 번 찌르더니 쇼는 금방 바의 좁은 공간에서 몸을 빼냈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행동은 리넨 천을 원래 자리에 걸어 두고 그를 찾아온 손님을 맞이하는 것뿐이다. 여자는 평소처럼 바의 조금 구석에 앉아 바텐더가 그녀를 보길 기다리고 있다. 마주치자마자 사르르, 미소로 녹아내리는 파란 눈이 그를 맞이한다.

“오늘도 코스모폴리탄, 맞으십니까?”

여자는 고개를 끄덕인다. 부탁해요, 바텐더 씨. 그리 속삭이며 몸을 앞으로 기울여서인지 가는 핀 몇 개로 고정한 긴 머리칼이 목덜미에서 쏟아져 내린다. 검은색 머리칼에서 문득 옅은 작약 향이 풍긴다. 그 향기에 어쩐지 목 뒤가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어 토키야는 애꿎은 셰이커의 금속 표면을 꽈악 쥐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에 조금 아찔해진 정신이 돌아온다.
셰이커에 얼음을 가득 채우고 보드카, 트리플 섹, 크랜베리 주스와 라임 주스를 넣는다. 여자는 조금 더 새큼한 맛을 즐겨 그녀의 몫을 만들 때 그는 라임 주스를 평소보다 살짝 더 넣는다. 이 정도면 충분히 어여쁜 색의 음료가 되겠지. 여자는 그가 셰이커를 흔드는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 연신 미소로 지켜보고 있다. 일에 집중하고 있다 해도, 그녀의 시선이 계속 그에게 따라붙는 걸 모를 정도는 아녔다. 여자가 바에 들어서자 이쪽을 흘긋거리는 사람이 많다는 것도 뻔히 느껴졌고.
키가 늘씬한 여자는 긴 검은 머리칼과 깊은 남색 눈의 미인이었다. 그가 일하는 바에 나타나기 시작한 건 얼마 전이라고 했지만, 그녀는 유독 토키야에게 흥미가 있는지, 아니면 그저 지루한 건지, 그가 일할 때면 이리 바 앞에 앉아 그를 관찰하곤 했다. 우연히도 그가 일하는 시간대에만 나타나 코스모폴리탄을 두어 잔 비우고 사라지는 여자는 이 바의 조용한 유명인이었다. 다만 누군가를 유혹하려는 의사도, 당하겠다는 의사도 없음을 확실히 하여 그녀에게 쓸모없이 다가가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를 상대할 수 있는 건 온전히 토키야의 특권이었고, 그의 임무였다.
그녀가 그의 앞에 앉아있을 동안만큼은 토키야도 그녀를 관찰할 기회가 생겼다. 오렌지 필을 글라스의 림 위에 얹어 장식을 마무리한 뒤 잔을 그녀의 앞에 놓자 여자는 예의 부드러운 표정으로 화답한다. 일행을 대동한 적이 없어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여자. 가장 진한 빛의 작약 꽃잎을 물려준 것 같은 입, 입술로 술을 느리게 머금는다. 잔에 남는 한 쌍의 붉은 꽃잎 자국, 아마 붉은 립스틱 자국일 것을 잠시 응시하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여자는 여전히 그를 쳐다보고 있다.

“잇치는 여전히 인기 있네.”

주문서를 전하러 온 웨이터가 여자에게는 들리지 않을 만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토키야는 귀찮다는 듯 냉랭한 표정으로 그 대답을 대신한다.

“부정하지는 말라고, 저렇게 아름다운 레이디가 찾아와서 매번 잇치만 잔뜩 구경하다 간다니. 적어도 그 관심은 즐겨야지. 아니면 즐기기엔 아직 너무 어린 건가?”
“적당히 하세요.”

주문서를 내려놓고 씻어뒀던 셰이커에 다시 얼음을 채우며 토키야는 한숨을 쉬었다. 웨이터, 진구지 렌은 짓궂게 웃으며 여자의 방향으로 눈을 찡긋, 하고 인사를 건넨다. 여자는 뭐가 재밌는지 입꼬리를 접어 올려 답례로 웃어준다.

“응, 역시 잇치가 좋으신가 보네.”
“제발 적당히 하세요. 주문 나왔습니다.”

일하러 가라며 슬쩍 턱짓하자 렌은 어이쿠, 하고 씨익 웃으며 다시 눈을 찡긋거렸다. 토키야가 몹시도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짓자 렌은 알았다며 트레이를 챙겼다. 힘내, 잇치. 하고 씩 웃는 게 단단히 착각한 모양이다. 그런 게 아니라 ‘직업상의 흥미’라 해명해도 동료들은 히죽히죽 웃으며 그를 수줍다고 놀리기만 할 뿐이다. 더 이상 해명하는 것도 소용없기도 했고, 착각해서 생길 피해도 없었기에 그는 더 이상의 입씨름은 쓸모없다 판단했다. 그렇다고 손님의 눈앞에서 히죽히죽 웃는 건 더없이 무례한 일이었다. 일을 하고 있을 때 한눈을 파는 건 그와는 맞지 않았고.
여자의 잔은 어느 새엔가 비어 있었다. 평소보다 조금 빠르다, 생각하며 돈을 계산하고 눈인사를 하고 나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았다. 똑바르게 걷는 뒷모습에는 아무도 따라붙지 않는다.

“잇치, 잇치,”
“주문입니까? 주문이라면 한 번만 부르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그게 아니라, 손님이 숄을 두고 가셨는데.”

렌이 손짓해 보이는 섬세한 솜씨로 짠 하얀색 숄은 분명히 여자가 바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어깨에 두르고 있던 물건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다른 행동을 취해야 했을 테지만, 이건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분 뒤, 토키야는 바를 렌에게 떠넘기고 여자를 뒤쫓아 골목으로 뛰쳐나왔다. 놓칠 수는 없다.
발걸음이 빠른 건 아녔는지, 혹은 그를 기다렸는지 그는 여자를 어두운 골목에서 금방 뒤쫓을 수 있었다. 또각, 또각, 똑바르게 걸어 그를 마주하는 눈에는 기쁨이 조금 깃들어 있다. 정말 그에게 흥미가 있다는 사람들의 말이 맞기라도 한 걸까? 물론, 제 얼굴이 여성에게 인기가 좋을 만한 인상인 것은 자각하고 있었으나, 이 여자에게 그것이 통용될 줄이야.
여자는 여전히 똑바르게 다가온다. 아주 낮은 굽도 아닐 텐데, 저렇게 완벽한 자세로 걸을 수 있다는 것도 대단하다면 대단하다. 긴장감이 뱃속에서 똬리를 틀고는 목을 빳빳이 세운다. 제 기색을 살피는 눈빛은 이젠 노골적이다. 그의 눈앞에서 멈춰선 여자는 키가 역시 꽤 크다. 고개를 기울여 키스라도 할 것처럼 여자는 가까운 거리에서 속삭였다.
소음기는 왜 안 챙겼어? 바텐더씨.

언제부터 파악한 거지. 차갑게 얼굴을 굳히며 숄 아래 숨겼던 권총을 빼 들기 전에 여자는 놀랍도록 빠른 손속으로 그의 손을 내리친다. 젠장, 선수를 제대로 빼앗겨 주도권은 여자에게 넘어갔다. 누가보면 연인을 거절하는 모양새겠군요, 그는 고소를 감추지 못하며 허리춤으로 손을 옮겼다. 미리 챙긴 나이프의 손잡이가 손에 잡혔다. 하지만, 이미 승기는 여자에게 기울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숄과 권총을 잠시 들여다보던 여자는 느긋하게 고개를 들어 그를 직시한다. 의뢰를 받았을 때부터 쉽지는 않을 거라 큰 수당을 약속받았는데, 그는 그 이유를 이제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마피아의 수뇌부에 가장 근접한 여자, 파란 눈의 아오이는 그를 간단히 압도했다. 실패한 암살은 용서받을 수 없다. 이게 아마 마지막일 테다. 언제나 냉정하게 유지한 페이스는 자꾸만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한다. 완벽하게 끝내려 했는데, 뻔히 보이는 함정에 빠졌다.
아니, 부정하지 말자. 이 일을 받았던 순간부터 그는 버림받고 살해당할 거란 판결을 받은 것이다. 가장 영향력이 강한 마피아의 간부를 암살하라니, 그가 아무리 유능하더라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초보 사냥꾼에게 호랑이를 죽이라는 소리나 다름없지. 무엇 때문에 밉보인 건가, 히트맨, 암살자치고 주제 넘게 뻣뻣하게 군 탓인가. 천애 고아인 그에게 남은 건 없었다. 그 사실 한 가지만큼은 다행이었다.
하지만 이상하지. 여전히 여유롭고, 어딘가 자애로운 얼굴로 여자는 그를 내려다봤다.

“그 손으로 나를 죽여봐.”

어서, 그럴 자신도 없으면서 칼을 겨눈 건 아니겠지?
다정한 말투 그대로, 여자는 잘 다듬은 깃털처럼 매끄러운 말을 이었다. 코끝에 닿는 숨결에 고급 담배의 향이 맴돈다. 그는 그대로 굳은 채, 손에서 자꾸만 미끄러지는 나이프를 재차 잡았다. 사람을 잡고, 도축하는 일을 시작하고 난 지 얼마 안 됐을 때 선물로 받았던 것의, 물소의 뿔로 수고스럽게 만든 손잡이는 지금은 차갑고 미끄럽기만 하다. 여자는 클러치에서 은색 라이터를 꺼냈다. 치익, 일렁이는 불꽃에 여자의 하얀 얼굴이 선명히 떠오른다. 하얀 금속으로 만든 담배의 물부리, 그 끝에 끼워진 담배에 불이 붙었다. 여자의 남빛 눈동자가 그를 한 번 담았다가, 다시 검은 속눈썹 사이로 감춰진다. 그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제 실패를 인정하도록 하죠.”

여자가 덮개를 닫은 건지 탁, 하며 라이터의 불이 꺼진다. 해가 떨어진 지 이미 오래라 짙어진 어둠 속에서 여자의 하체는 그 안으로 녹아들었다. 보이는 것은 눈앞에 있는 여자가 든 담배의 불빛. 아오이는 물부리의 끝을 물고는 살짝 연기를 빨아들였다.

“그렇다면 다행이야. 더 이상 너 같은 아이를 상대하는 건 피곤했거든.”

당연하다는 듯이 내뱉는 어투가 담담하다. 떠돌이 개라도 언급하는 듯한 어투, 말의 끝에 달라붙는 연기의 향이 더욱 진해졌다. 토키야는 할 말을 혀끝으로 고르다가는 내뱉었다. 숨통에 그 하얀 연기가 달라붙어 온다.

“아이라고 부르기엔 당신도 꽤 젊은 축에 속한다 생각합니다만. 수집한 모든 정보와 비교해봤을 때, 그런 얼굴의 여인이 이 조직의 상위에 서 있을 줄이야. 솔직히 놀랐습니다.”
“어려 보인다는 칭찬으로 들을게. 그리고 여자도 똑같이 사람, 총을 쥐여주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건 똑같아. 방아쇠를 당길 손가락만 온전하면 되지.”

여자는 붉게 물든 입술을 휘어 웃으며 얄쌍한 물부리를 쥔 손에서 집게손가락만 까닥여 보인다. 입안이 바싹 말라오는 걸 느끼며 토키야는 혀를 내어 제 입술을 훑었다. 여자를 죽이라는 임무를 처음 받았을 때부터 들은 말이다. 기습에 실패했다면 끝이야. ‘그 여자’는 아무리 자상하더라도 자비롭지 않아.
그래, 자상하다. 마치 제 동생이라도 대하듯 부드러운 말투 하며, 간간이 그의 모습을 훑는 눈길이며. 그 어디에도 살기란 느껴지지 않는다. 그건 전부 그녀에게 그를 직접 죽이고 싶은 마음이 없기 때문이겠지. 마피아 간부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는 눈을 감았다. 괜찮다, 몇 번이고 각오한 순간이다. 오히려, 이제 끝이란 해방감이 마음속에서 도사리고 있어서 그는 놀라고 말았다.

“이름은 뭐라고 하니?”

여전히 다정한 미소를 지은 채, 흐린 불빛 아래에서 여자가 묻는다. 마법처럼 빛나는 남색 눈에 취하기라도 한 건지, 토키야는 제 이름을 말하고 만다. 이치노세 토키야.

그래? 나는 호시카게 아오이. 그냥 아오이라 불러도 상관없어.
여자, 아오이는 향수의 흔적이 가볍게 남은 향긋한 말을 들려준다. 마치 토키야를 놓아주기라도 할 것처럼. 아오이. 푸르다는 의미를 가진 이름이 참으로 단순하다. 그녀가 태어난 뒤, 그 눈 색을 본 어미가 지어준 이름일까, 아니면 그녀의 눈빛을 사랑하게 된 어느 사람이 지어준 것일까?

“그렇다면 아오이.”
“응, 토키야. 예쁜 이름이네.”

토키야, 라는 이름은 부모님에게서 받았다. 그가 태어난 뒤, 며칠도 안 지나 함께 세상을 떠난 부모님. 홀로 남은 토키야는 살아남아야 했고, 그 때문에 손에 총과 칼을 들게 되었다. 돈을 받아 사람을 도살하고 남은 찌꺼기에 기생하는 추한 것. 아오이가 담뱃재를 툭툭, 바닥으로 털었다. 빨갛고 하얗게 빛나는 재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걸 토키야는 멍하게 바라봤다.

“원한다면, 함께 오지 않을래?”

그녀의 말은 명백한 초대였다. 악의가 아닌, 호의를 담은 제안. 긴 속눈썹 사이로 푸른 눈이 깜빡, 그를 응시한다. 그 호의 속에 그녀가 담은 건 동정인가. 아오이는 그가 고용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아마 마피아 조직의 우수한 정보력 덕에 그가 누구인지도 샅샅이 알아내었을 거라 토키야는 제가 아끼는 책을 열 권이라도 걸 수 있었다.
가여운 고아 소년에게 던져주는 동정과는 조금 다른 것이, 그녀는 그에게 선택권을 주지 않고 있었다. 사실상 거절은 불가능한 이 상황에서 손을 내밀어주는 포식자.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나이프고 그녀는 점점 끝이 줄어드는 담배와 그 하얀 물부리뿐.
토키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는 오히려 완벽한 제안이다. 마피아 간부의 보호와 지원. 그래서, 토키야는 제 판단력을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여태까지 그래왔듯, 그 자신에게는 이 선택이 옳을 것이란 자신감이 있었으니.

“좋습니다. 당신이… 원한다면. 아오이.”

거의 그림자 속에 숨기 시작한 붉은 입술이 기분 좋은 호선을 그린다. 어둠과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길고 검은 머리의 여자. 어둠 속에서 빛나는 건 이제 그 눈밖에 없다. 그녀가 몸을 돌려 걸어가는 소리에 맞춰 토키야도 뒤늦게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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