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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안면이 있는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 불렀다.

신을 닮은 자라고.

 

 

 

01

 

 

 

“아멘.”

 

 

퍽 걷어 올린 입매가 나직이 달싹였다. 일이 끝나면 그는 의식처럼 위 말을 되풀이했다. 열과 함께 혼이 서늘하게 빠져나가는 그릇을 보며, 늘. 왜 그런 사족을 달게 되었는지, 알렌으로선 전혀 알 길이 없다. 검은 윤택이 반지르르 흐르는 장갑을 고쳐 꼈다. 그와 동떨어진 위치에서 알렌은 크로스를 주시했다. 사소한 동선 하나에도 시선이 따라 붙었다. 외부에선 표면적으로 그가 신부라는 소식을 들었다. 신앙이 깊은 사람치곤 평소 행실을 미루어 보나, 성경 하나 없는 그의 소지품을 보아 믿기 힘든 사실이다. 피로 얼룩진 골목에서 그는 신을 닮은 자라고 불리었다. 대체 어디가 닮은 것인지. 이 역시 알렌은 먼지 하나만큼도 알지 못했다.

 

 

크로스의 손등 위로 얹은 시선을 끌어 내렸다. 그의 발치까지 붉은 핏물이 진득하게 밀려있었다. 행여 구둣발에 묻을까. 크로스는 걸음을 뒤로 물렀다. 미간에서 피가 샘솟는 시체를 무정한 눈길로 스친 그가 입에 담배를 물었다. 알렌은 소매를 걷어 올렸다. 사라질 듯 옅은 허연 머리칼과 피부 곳곳에 붉은 꽃물이 점철되어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도화지 위에 피어난 석산 같기도 했다. 불과 십 분여 전까지만 해도 오물 하나 없이 말끔했는데. 뺨에서 비린내가 비강까지 기어왔다. 묽은 액체는 그의 턱 선을 타고 똑, 똑 구둣발 아래로 뭉개졌다. 입술을 근질이는 한숨을 다른 말로 짓눌렀다.

 

 

 

“금고를 건드리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나보네요.”

 

 

 

덕분에 옷도 버리고. 덧댄 말에 힘을 그득 불어 넣었다. 흡사 세탁 비를 요구하는 억양이었다. 애초에 그가 무작정 총구를 들이민 덕에 엉망이 되었으니. 그는 허리를 숙여 땅바닥에 퍼진 봉투 한 자루를 집어 들었다. 봉투 끄트머리가 피에 절어 무거웠다. 뒤처리는 언제나 깔끔하게. 누군가에게 귀에 피딱지가 앉을 만큼 들었던 말이다. 알렌은 부지런하게 시체의 팔을 잡아끌었다.

 

 

 

“내 잘못이냐, 거기 있던 네놈 잘못이지.”

 

 

 

길게 늘이는 숨결이 탁하게 한들거렸다. 알렌은 입을 쩍 벌린 봉투에 시체를 구겨 넣었다. 봉투에 가득 찬 무게가 묵직하니 도난당할 일은 없을 것 같다. 고인 핏물에 들이민 고개가 비쳤다. 붉게 떠오른 몰골이 가관이었다, 그는 둥실대는 자신의 얼굴을 피해 살점을 찾아 살폈다. 강아지처럼 코를 박 듯 살점을 찾아다니는 모습을 시선이 뒤따랐다. 그를 현장에 처음 데리고 나왔을 적이 문득 떠올랐다. 잔뜩 뭉그러진 나약함을 게워내던 어린 등을. 손 거죽이 벗겨나가도록 비누로 씻어내던, 작은 그를. 여러 번 자신의 나약한 형태를 보고 나서야 그는 제 발로 일어섰다. 먹는 양과 달리 영 살이 붙지 않은 가녀린 다리로. 크로스는 다시금 허공에 연기를 불어넣었다.

 

 

 

“큰 덩어리만 대충 담아 둬. 나머진 충견이 알아서 하겠지.”

 

 

 

충견이라고만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알렌은 그가 누굴 말하는지 대번에 알아챘다. 하워드 링크. 보스 루베리에의 경비와 시체 처리를 도맡은 사내였다. 원체 꼼꼼한 성격 덕에 그가 거친 현장엔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고 명성이 자자하다. 크로스는 연기를 깊이 빨아 들였다. 입에서 담배를 때며, 손가락을 허공에 탁탁 털었다. 빨갛게 타들어간 불씨가 사방에 흩어졌다. 아, 쉬고 싶다.

 

 

 

“먼저 간다.”

 

 

 

말괄량이 아가씨가 기다리고 있어서 말이지. 그는 떠오르는 인영에 단정한 입가를 풀어 헤쳤다. 유하게 올라간 입 언저리에서 흐린 연기가 흩어졌다.

 

 

 

 

 

02

 

 

기억은 그물처럼 한 번 끌어올리기 시작하면 여러 잔해를 달고 끝없이 올랐다. 크로스는 초라하게 떨던 작은 어깨를 상기시켰다. 알렌은 어린 나이에 양아버지를 잃었다. 한 치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방황하다 조직에 들어온 아이였다. 그가 조직에 들어왔을 때 나이가 열이었다. 친구들과 길목을 쏘다니며 어설픈 마피아 놀음이나 흉내 내고 주머니를 가득 채운 사탕 때문에 충치를 앓는. 어처구니없이 어린 나이였다. 아이는 동태처럼 죽은 눈을 하고선 모순적으로 삶에 집착을 했다.

 

 

귀찮은 것은 질색이라며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던 크로스가 타인의 삶에 손을 뻗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겠거니. 제 아무리 신을 닮은 자라 하여도 한낱 인간. 그는 어리석었고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리셸 마티니, 현재 정보 수집을 맡은 그녀는 본래 조직 사람이 아니었다. 조직엔 여러 부류의 사람이 집합된 곳이다. 개중 지독하게 어두운 과거를 안은 사람도 있고, 실없는 계기로 조직에 발을 들인 사람도 있다. 리셸은 전자에 속했다.

 

 

리셸의 부모님은 조직과 주로 마약 거래를 다뤘다. 유흥가를 거닐면 보기 드물게 네온사인이 아닌 나무로 팬 글자가 새겨진 단출한 가게였다. 존재감은 없지만, 그 가게는 분명히 유흥가 구석에서 숨죽여 공존했다. 너무 눈에 뜨이지도 않던 게 온갖 약물을 취급하던 가게와 걸맞았다. 크로스도 퍽 가게를 마음에 들어 했다. 눈에 뜨이지 않는 듯, 시선을 사로잡는 가게를.

 

 

이유는 모르겠으나, 그가 찾아갔을 때 가게는 이미 피바다였다. 반듯한 테이블은 모두 넘어가 있었다. 벽에는 피가 줄을 그리며 눈물처럼 흘렀다. 이곳에 발을 드밀면 돈은 보장해도 목숨은 보장하지 못했다. 좋은 가게였는데. 아쉬움을 다시며 가게를 나서려던 찰나. 들어선 안 될, 그 가냘픈 발버둥을. 크로스는 들었다.

 

 

 

-살려주세요, 아저씨.

 

 

 

울음이 엉겨 붙어 볼품없이 일그러진 음성이었다. 가게의 각진 구석에서 작은 어깨를 여리게 떨던 그녀를 보았다. 보아선 안 되었다. 시간이 멈춘 듯, 공기가 흐르지 않는 공간에서. 초침과 시침이 겹쳐지듯 그들의 운명이 겹쳐졌다. 타인의 삶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다짐했거늘. 눈가에 주름을 깊게 잡았다.

 

 

문 앞에 멈춰 선 그는 문고리를 돌렸다. 손바닥을 눌러오는 감촉이 서늘했다. 문 너머에 있을 그녀의 모습을 미리 그려보았다. 책상 오른편엔 그녀가 애용하는 머그컵이 있겠지. 그것만으로도 벌써 피로가 물에 씻겨가는 느낌이다. 열린 문틈을 비집고 푸른 모니터 빛이 밀려왔다.

 

 

 

“망나니씨 오셨어요?”

 

 

 

비좁은 방 벽면에 딱 붙은 소파로 눈길이 흘렀다. 리셸은 다리를 꼬아 앉은 채였다. 이미 일을 끝냈는지 그녀의 손에는 책상 오른편에 있으리라 예측한 머그컵이 들려있었다. 목을 덮은 검정 폴라티 아래로 굴곡진 윤곽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는 소파까지 걸음을 당겼다. 뚜벅뚜벅. 나른한 구둣발 소리가 방을 가로질렀다. 리셸은 홀짝 머그컵을 기울였다. 일이 많아지면서 그녀가 커피를 찾는 횟수가 부쩍 늘었다. 예전엔 디저트가 없으면 입에도 대지 않던 커피였는데. 정사각형으로 이루어진 방 안을 고소한 커피향이 순환했다. 현장의 비린내에 비하면 훨씬 향긋하지만. 그녀는 다가오는 크로스의 시선을 맞추었다. 잘그락, 나른한 목소리가 목울대를 울렸다.

 

 

 

“CCTV라면 이미 확보해 놨지.”

 

 

 

나긋하게 구르는 음성에서 마저 커피 향이 나는 것 같다고 크로스는 생각했다. 리셸은 턱 끝으로 책상을 가리켰다. 크로스는 책상에 시선도 주지 않고 그녀의 옆에 털썩 앉았다. 소파가 옅게 출렁였다. 낮은 시야에 먼지가 뽀얗게 일었다. 그는 등받이에 팔을 걸치며 몸을 깊게 파묻었다. 팔 다리를 휘감은 피로가 증발하는 느낌이다. 이제야 좀 살겠네. 노곤하게 늘어진 팔 안으로 폭 들어온 리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작은 머리통이 그의 어깨를 꾹 눌렀다.

 

 

 

“오늘은 어땠어요?”

“다를 게 있나.”

 

 

 

그냥 쑤시고 쏘는 게 전부였지. 입 밖으로 낸 살벌한 현실과 달리 굴곡 지지 않은 평탄한 어투였다. 마치 그에겐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출근 준비를 하는 사사로운 일상인 양. 크로스를 비롯해, 조직이 맡은 일은 대게 그런 업이었다. 누군가의 행복이나 영원을 갈취하기도 하고 때론 누군가에게 찰나의 공상을 안겨주기도 한다. 그것이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죽고 죽이는 관계가 수갑처럼 맞물린 이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한 발돋움. 칼로 난도질한 인정은 걸레짝처럼 너덜거려 크로스 마리안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러니 크로스의 어투가 지극히도 평탄한건 여러모로 당연했다. 그에게 발돋움질은 아침밥을 먹는 것과 동급이니까.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그래도 난, 당신의 매 순간이 궁금한걸.”

 

 

 

리셸은 고요히 눈 끝을 휘어 접었다. 둥그런 눈매가 곱게 휘어지는 모양새가 퍽 귀엽다. 1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을 얼굴이었다. 크로스는 안개가 흐리게 낀 벽안을 상기시켰다. 꽉 쥐면 흩어질 것처럼 흐릿했던, 그녀를.

 

 

 

“있잖아.”

 

 

 

석자만 듣고서 화제가 전환되겠구나, 하고 크로스는 대번에 짐작했다. 맥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으니까. 그는 답을 하는 대신 그녀를 힐끔 쳐다보았다.

 

 

 

“나, 이제 슬슬 현장에 나갈 때 되지 않았어?”

 

 

 

눈을 동글게 열어 뜨고 그녀는 물었다. 목적지조차 언급되지 않은 질문에는 많은 의미들이 함축되어 있겠지. 귀에 피가 맺힐 만큼 들은 말이어서 일까. 크로스는 소리에 가려진 무수한 언어들을 어렵지 않게 조합해냈다.

 

 

 

“아서라, 말괄량이 아가씨께서 갈만한 곳이 아니다.”

 

 

 

별처럼 밝은 열망이 우수수 쏟아지는 눈길을 피해, 크로스는 시선을 모로 돌렸다. 스크린 여러 대를 띄워놓은 컴퓨터 화면이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돌연 리셸이 크로스의 뺨에 손을 뻗어왔다. 눈을 만지듯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돌아간 시선을 억지로 맞추었다. 붉게 타들어가는 눈동자에 넘실대는 초상은 바위처럼 단단해 보이기까지 했다. 날 때부터 순한 눈매에 섞여든 붉은 빛과 파랑 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리셸은 순한 눈매를 무너트리며 말을 비집었다. 난 그것만을 위해 살아왔어. 그리고

 

 

 

“나에게 살아가라고 한 것도.”

 

 

 

말 사이로 옅은 호흡을 갈아 끼우며, 마저 말을 이어 붙였다.

 

 

 

“총을 건넨 것도 당신이었어.”

 

 

 

그녀의 말을 따라, 그는 천천히 제 기억 속을 헤집었다. 뒤적이는 손끝을 여러 가지 기억이 스치고 나서야 그 날 밤의 기억이 새벽녘처럼 어슴푸레 밝아왔다. 밀려오는 어둠에 잠겨 죽을 것만 같던, 역하게 짙었던 밤이었다.

 

 

 

 

03

 

 

어둠이 하늘을 덧칠하면 그녀는 울음으로 밤을 찢어 발겼다. 피와 같은 쇳소리가 다 쉰 목을 사정없이 긁어 내렸다. 그날도 어김없는 애통한 울음이 복도를 건너 왔다. 그녀의 피맺힌 우울은 형체를 잃고 밤마다 복도를 배회했다. 아침 해가 허여멀개 밀려올 적엔, 녹아내린 우울을 이불 아래로 꽁꽁 숨겼고. 크로스는 멍청히 웃던 낯짝을 떠올렸다. 타들어가는 필터 끝을 보며 그녀의 기억을 함께 태워 올렸다. 시야에 맺힌 연기처럼 그날의 기억이 흐리게 한들거렸다.

 

 

-살려주세요, 아저씨.

 

 

그 말은 억센 손길로 숨통을 조여 왔다. 누군가의 목숨을 짊어지는 일은 질색이었다. 쓸모없는 책임감에 어깨가 굽어질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는 리셸의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그녀는 살려달라고 했다. 제 발에 엉겨 목숨을 구걸하던 인간들과는 달랐다. 손을 잡아선 안 되었다. 애달프게 떨던 몸을 끌어안아선 안 되었다. 크로스 마리안은 신이 아니었고, 그 누구도 구원할 수 없으니까.

 

 

크로스는 어깨 너머로 힐끔 시선을 던졌다. 피곤에 절은 몸을 소파에 축 늘인 알렌이 보였다. 스크린이 자잘하게 분열된 모니터로 지난 동선들이 부자연스럽게 흘렀다. 드나드는 사람들이 거꾸로 걸었다. 무기고에 잔고양이가 들었는지 확인하던 차였다. 기록된 시간을 되감는 건 터무니없이 간단했다. 그저 키보드 몇 번 두드리면 되는 일이다. 신은 우리의 시간을 기록하지 않았고, 저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을 돌릴 수 없다. 어리석지만 당연한 이야기다.

 

 

만일 그 날로 시간을 감을 수 있다면, 선택이 달라졌을까. 그는 지그시 눈을 내리 감았다. 복도를 정처 없이 거니는 우울의 초상에 귀를 기울였다. 철현을 키듯 애달픈 소리가 높낮이를 달리하며 자기 자신을 연주했다. 거리를 웃도는 흔한 이야기보다 애절했고 벼랑 끝에 발을 걸쳐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보다 간절했다. 그녀는 절정에 있었다.

 

 

크로스는 보폭을 넓혀 문으로 향했다. 바닥이 삐걱 이며 걸음에 따라 붙었다. 부스럭, 기척에 예민한 알렌이 졸음기를 떨치지 못한 눈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흐아암, 동굴처럼 크게 벌어진 입 속으로 목청이 떨리는 게 보였다. 멍청한 낯이 꼭 리셸을 닮아있다. 빛이 솟구치는 화면 반대편 얼굴에 그늘이 져 있었다.

 

 

 

“어디 가시게요?”

 

 

 

그는 손에 쥔 빈 병을 흔들었다. 초록색 유리 너머로 낮은 물결이 마냥 찰랑댔다.

 

 

 

“마실게 다 떨어졌잖냐.”

 

 

 

아, 예. 다녀오세요. 알렌은 비몽사몽 발음을 짓뭉개며 답했다. 평소라면 그에게 가져오라고 시켰을 테다. 다시 꿈결을 살포시 밟고 있을 알렌은 모르겠지만.

 

 

문을 나서자마자 크로스는 빈 병을 아무렇게나 패대기쳤다. 그는 검은 커튼에 불투명하게 가려진 복도 저편을 주시했다. 길게 늘어진 복도 끝자락에는 리셸의 방이 있다. 그녀를 조직에 거두어들인 날, 임시로 내어준 방이었다. 본래 창고로 사용하던 방인지라 비좁고 먼지가 뽀얗게 흔들거렸다. 조만간 더 넓고 쾌적한 곳으로 옮겨주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한사코 거절했다. 복도 끝에 자리했다는 이유로 사람의 왕래가 드물었다. 리셸은 그 점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선한 눈매를 그리며 웃던 낯이 흩어질듯 허옇다.

 

 

그녀가 왜 구석진 방을 선호하였는지. 멀지 않은 시일에 그는 깨달았다. 온전한 우울을 위해. 들어줄 이 없는 가련한 비명이 다하기 위함이라고. 제 몫을 다한 절규의 끝에 남는 건 늘 체념과 무한한 밤이었다. 그녀는 밤이 오면 어제와 다름없이 절망했다. 피부는 금세 퍼석해졌고, 눈 밑 그늘은 짙어갔다.

 

 

 

‘듣지 못할 거라 생각했겠지.’

 

 

 

매일 밤, 저 벽에 등을 기대어 선줄도 모르고. 로렐라이의 노랫소리에 귀가 멀고 눈을 감은 선원처럼 홀린 듯 발끝을 틀었다. 찢어질 듯 가녀리게 울리는 선율은 여전히 자신을 노래했다. 크로스 마리안은 그 선율에 취해 있었다. 조금 더 듣고 싶은 마음이 없진 않았지만. 그는 문고리로 팔을 뻗었다. 아직은 무너지지 마라. 닿을 곳 없는 외마디를 입 안에 가둔 채. 그녀의 이름을 나직이 소리 냈다.

 

 

 

“…리셸.”

 

 

 

한 순간이었다. 마치 문턱 너머는 차원이 다른 세계 마냥 고요했다. 일말의 훌쩍거림도 없이 원래부터 없었다는 양. 깊은 심연으로 끌려가듯 소리가 멎었다. 그 사실이 놀라웠다. 놀라움을 넘어 섬뜩할 지경이었다.

 

 

그녀는 타인 앞에서 절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눈물은커녕 칭얼대는 말조차 한 적이 없다. 리셸은 오랜 역사와 함께 길이 내려오던 중개업 집안의 딸이었다. 뒤 세계에 발을 들인 자라면 한 번쯤은 이름을 들어봤을 것이다. 날 때부터 그런 집안에서 자랐으니. 말을 떼기 시작한 시절부터 그녀는 눈물을 삼키는 법을 체득해야만 했다. 우는 모습은 돈을 불러오지 않기 때문이다. 저보다 몇 배나 덩치가 사나운 아저씨들의 시선에 짓눌리지 않으려고 그녀는 미소를 배웠다. 그렇게 하니 몇몇은 머리를 넘겨주며 돈 한두 푼을 쥐어주었다고 했다.

 

 

간신히 그녀는 자신을 찾아가는 향해에 올랐다. 넘실대는 파도에 밀려 언젠간 해안가에 도달하겠지. 그녀 자신이 자신의 일부를 지워버린 것처럼. 무척이나 인위적이고 자연스레. 죽음은 온전한 그녀로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었다.

 

 

침대 위로 둥그런 언덕이 솟아 있었다. 크로스는 성큼 발을 뻗었다. 침대에 걸터앉으며 품을 뒤적였다. 매트리스가 살짝 가라앉았다. 유감스럽게도 담배를 놓고 온 모양이다. 그는 허전한 품에서 손을 떼어냈다. 묘지처럼 튀어나온 언덕 표면이 잘게 떨고 있었다. 그는 담배 대신 목을 열어 공기를 한 아름 그러모았다. 폐로 똑 떨어지는 공기가 유난히 짜다. 그는 숨을 도로 내뱉으며 말했다.

 

 

 

“살아남은 게 후회되나.”

 

 

 

그는 허공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었다. 축축하게 늘어진 어둠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이불 끄트머리가 바스락거렸다. 잔뜩 헤집어진 머리통이 톡 붉게 튀어 나왔다. 난장판인 머리칼에 반쯤 가려진 몰골이 파리했다. 그는 허리를 틀어 앉았다. 허옇게 뜬 눈가를 손끝으로 쓸어주었다. 치즈케이크처럼 폭신하고 촉촉했다. 훔치면 명백히 묻어나는 눈물만이 뜨거웠다. 깨어지지 않을 단단한 눈매로 리셸을 건너봤다. 그녀는 고개를 살살 내저었다.

 

 

 

-살려주세요, 아저씨.

 

 

 

엎어지면 코 박을 거리에 있는 죽음 앞에서 그녀는 발버둥 쳤다. 툭 치면 와르르 쏟아질 눈을 하고선. 너는 밟힌 지렁이처럼 몸부림쳤지. 초라하고 볼품없이. 그럼에도 살고 싶다는 본능에 충실하여 꼴갑잖게. 끝없이 악몽을 방황하게 될지 몰랐을 것이다. 그러니 그녀는 죽음 앞에 몸부림 쳐 온갖 오물을 뒤집어쓰고 그 오물은 너의 살갗을 녹였다. 죽음을 회피한 그녀에게 노한 신은 출구 없는 악몽을 선사했다. 죄로 밤마다 울부짖으며 성대를 무참히 혹사시켰다. 신에게 버림받은 그녀는 자의로 조직에 들어왔다. 그리고 삶도 목적도 없는 그녀를 인도한 이가 바로 크로스 마리안이었다. 그는 한숨처럼 옅은 울림을 또렷하게 굴렸다.

 

 

 

“그럼 살아라.”

 

 

 

그는 결코 신이 되지 못하는 신을 ‘닮고 싶은’ 자였다.

 

 

달빛이 바라보는 그의 상냥한 미소를 얼핏 훔쳐봤다. 그는 몸을 뒤로 젖혔다. 한결 가벼워진 목소리였다. 남은 손을 크로스는 제 허벅지께로 가져갔다. 묵직한 무게가 갑작스레 이불 위로 툭 떨어졌다. 놀란 토끼눈을 한 리셸이 그 무게를 바라보았다. 그가 파트너처럼 끼고 살던 리볼버가 달빛을 받아 옅게 반짝였다. 은색 몸 선이 단정한 게 달빛을 받아 푸르스름하니 서늘하기까지 했다. 이유 모를 찬바람이 뒷목을 타고 곧장 미끄러졌다. 잘게 흔들리는 시선이 크로스와 권총 사이를 바삐 오갔다. 그는 마치 리셸의 머릿속을 읽은 양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보란 듯이 멋지게 자라서, 그 놈들 미간에 구멍 서너 개쯤은 뚫어줘야 하지 않겠냐.”

 

 

 

리셸의 미간을 아프지 않게끔 톡톡 두드렸다. 매끄럽게 빠지는 울림은 깡마른 매력이 있었다. 마치 악마의 속삭임 같은. 무구한 인간을 현혹해 타락시키는 악마. 그의 음성이 질척하게 귀 안을 범람해 왔다. 무정하기로 소문난 조직의 실력자.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사람을 처리하는 크로스 마리안. 표면적으로 작은 성당의 신부. 인간을 타락시키는 악마와 새하얀 손길로 구원을 내미는 신. 크로스 마리안은 참으로 이질적이고 모순적인 인간이었다. 아이를 꿰어내기 위한, 꿀 바른 말이란 것을 알면서도 리셸은 내밀어진 손을 흔쾌히 잡았다. 신앙이 깊어서도 아니었다. 신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모순적인 존재, 크로스 마리안을 그녀는 구원이라 칭했다. 자신의 인생을 망칠 구원자. 그런 확신이 들었다.

 

 

죽은 식물은 볼품없이 메말라 툭 건드리면 무너질 법 하다. 그럼에도 햇빛 한 줄기 보겠다며 고개를 악바리로 치켜들었다. 죽어가는 식물은 햇빛으로 목을 축였다. 크로스는 그 위로 물을 뿌렸다. 주위에선 부질없다, 글렀다 라며 냉혹한 현실을 몰아 붙였다. 이렇게 살아가려고 하는 식물을, 더할 나위 없는 자살 행위임을 알면서도 악착같이 고개를 치든 생명을. 그녀는 주위 반응을 엎고 기적같이 다시 일어났다. 곧 휘청하고 꺾어질 것만 같은 다리로 단단히 말이다. 해를 보기 위해 고개를 꿋꿋이 치켜들었다.

 

 

―지극히 모순적이고, 인위적인. 자연스러운 구원이었다.

 

 

 

 

 

04

 

 

시린 잔상을 지우기 위해 그는 느릿하게 눈꺼풀을 여닫았다. 한 겹씩 얇아지는 과거 위로 현재의 리셸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마치 서리 낀 유리창을 닦아 내듯. 똘망한 빛이 그녀의 눈동자 언저리를 따라 도르륵 굴렀다. 멀거니 앉아 죄 없는 시간만 죽이던 때에 비해 좋은 낯이었다. 그땐 정말 죽는 거 아닌가 싶었지.

 

문득 떠오른 터무니없이 어렸던 후배의 여린 등과 오늘의 모습이 망막을 쓸어 내렸다. 살육과는 영 친하지 않았던 어린 알렌과 이젠 덤덤히 시체를 봉투에 우겨넣던 손길. 마치 쓰레기를 버리듯, 무감각했던 어투. 크로스가 사는 세계는 그런 곳이다. 밀쳐진 벽에 벅벅 긁어대 감정이 무뎌지는. 부처도 이곳에 온다면 기계처럼 살육을 거듭하는 살인기계가 될지도 모른다. 이 세계는 그런 곳이니까.

 

 

뇌가 반사적으로 거부하듯이 그녀가 총을 쥔 모습은 쉬이 그려지지 않았다. 둥글게 떨어지는 어깨로 이어진 팔. 작은 손 안에 꽉 들어차는 총. 무덤덤한 눈길. 상상이 이곳까지 미치자 형상은 시야에서 튕겨져 나갔다. 줄곧 그녀를 지켜봐온 그로선 전혀 상상이 가지 않았다. 하고 싶지도 않고. 때문에 그는 침묵했다. 리셸이 알지 못하는 깊은 골짜기에 보물단지처럼 자신을 꼭꼭 숨겨두고 그녀를 방치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럼에도 리셸은 변하지 않았으면 했다. 지독하리만치 골이 깊은 절망 앞에서 절벽처럼 깎아내린 모순이었다.

 

 

 

“살아가라고는 했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리셸은 입을 벙긋 벌렸다. 그의 나직한 음성에 짓눌려 끝내 소리가 되지 못한 채 앙금처럼 가라앉았지만. 그는 두 음절로 묵직하게 운을 띄웠다. 근데,

 

“그게 이딴 엿 같은 세계에서라고는 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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